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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국어국문전공 학술답사 (전라도)
국어국문 <www4340@ddongduk.ac.kr> 조회수:2299
2004-05-05 02:53:00
2004년도 학술답사
 
 
※ 첫째 날
 

1. 광한루
 
전북 남원시에 위치한 누정으로 보물 제 2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광한루원은 조경공간으로서 광한루를 포함한 경원이다. 광한루원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 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들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 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속의 3개의 섬,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베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2. 천은사
 
전남 구례군에 위치한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3) 덕운이 창건하였는데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헌강왕 1년(875) 도선이 중건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 1선찰로 승격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사찰이 불에 타버리자 광해군 2년(1610) 혜정선사가 중창하였다. 숙종 4년 (1679) 조유선사가 중건하였으며 숙종 41년(1715)에 <천은사영산회상도>가 조성되었고 영조 25년(1749)에 <천은사칠성도>가 제작되었다.
 
영조 50년(1774) 혜암선사가 사찰을 중건하였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대부분 이때의 것으로 보여 지며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팔상전, 응진전, 진영당, 칠성각, 첨성각, 승회당, 보제루, 방장선원, 종무소, 일주문, 수홍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조 52년(1776)에 보물 제 924호로 지정된 <천은사극락전아미타후불정화>가 김어인, 신암 등 모두 14명이 참여하여 조성되었으며 순조 33년(1833) <천은사재석천용도>가 제작되었다.
 
    
3. 화엄사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 고찰로 지리산에 있는 사찰 중에서 가장 크고 장엄한 절이다. 사찰의 규모가 웅장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갖가지 문화재도 산재해 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다. 백제성왕 22년(544)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 하여 절의 이름을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과 대웅상적광전만 세워졌고 그 후 선덕여왕 12년(644)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으며 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국사가 또 다시 증축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진 것을 인조 8년(1630)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에 완성하였다.
 
경내 건물 중 각황전은 국보 제 67호로 지정된 매우 유명한 건물이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그 웅장한 외양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화엄사 경내 보물 가운데서도 대웅전 양편에 서 있는 5층탑은 뛰어난 조형성과 섬세한 장식이 눈길을 끄는 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 132호와 133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이곳의 대웅전은 보물 299호로 조선시대의 우수한 예술성이 잘 나타나 있다. 가장 아름다운 불교유물의 하나로 꼽히는 ‘4사자 3층 석탑’(국보 제 35호)은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히고 인간의 희로애락을 상징하고 있다.
 
    
4. 운조루
 
조선 영조 52년(1776)에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집으로 99간의 대저택의 규모나 구조가 당시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현존하는 주요부분은 사랑채와 안채이며, 그 밖에 행랑채, 사당, 연당, 등이 있다. 사랑채는 3채가 있는데 큰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m의 축대위에 있으며, 중문 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높이 약 60cm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있으며, 초석은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전면 마루 끝에 선 것이 지름 약 2.3m의 둥근 기둥이며, 다른 것은 모두 모난 기둥이다. 안채 남동쪽에 사당이 있으며, 맞배지붕 홀 처마집이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 마당 건너에 연당이 있는데,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 삼태봉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 둘째 날
 
5. 한국 대나무 박물관
 
예로부터 대나무고을로 널리 알려진 담양군이 1966년 죽세공예품의 보존?전시, 기술정보의 교환, 판매 알선을 위해 '죽세공예센터'라는 이름으로 담양군 담양읍에 설립하였다. 1981년 죽물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8년 담양읍 천변리에 조성된 대나무 관련 종합관광단지 내로 이전하였으며, 2003년 3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박물관 소장품은 국산 죽제품 2,146점, 외국 죽제품 355점, 기타 54점 등 총 2,555점에 이른다. 전시실은 4개로서, 제1전시실에서는 대나무의 성장과정과 각종 자료 및 죽순을 이용한 식품, 문헌에 나오는 대나무의 효능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사용했던 부채와 방건통 등 옛 죽제품과 중요무형문화재(낙죽장?죽렴장?채상장?참빗장)의 제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에는 현대와 과거의 실생활에 주로 이용된 대나무 여름용품, 무기류, 장신구 등을 전시한다. 기획전시실(특별실)에는 198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제품경진대회에서 입선한 제품들이 연도별로 전시되어 있다.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는 죽세공예 기능을 보유한 무형문화재가 기능 전수를 하며, 죽종장에는 한국에 자생하는 대나무 64품종이 식재되어 있다.
 
    
6. 면앙정
 
면앙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송순이 고향마을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뒷산 제월봉 언덕위에 지은 정자이다. 이렇게 면앙정은 정자의 이름이면서 송순의 호이기도 하다. 면앙이란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본다는 뜻으로, 아무런 사심이나 꾸밈이 없는 너르고 당당한 경지를 바라는 송순의 마음이 여기에서 읽힌다. 면앙정으로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다. 잔뜩 우거져서 어둑신한 대숲 사이로 돌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을 다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제법 너른 평지가 나서고 그 언덕 끝에 수수한 정자가 서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가운데 한 칸짜리 방이 있고 빙 둘러 사방에 마루가 깔려 있어 주변의 자연을 안아 들인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망의 중심은 정자 뒤편에 있다. 저 멀리 아련히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뚝 떨어져 깔린 평야, 그 위로 시원하게 트인 하늘이 내다보는 사람의 마음을 활달하게 한다.
    
 
7. 송강정
 
송강정은 담양읍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다. 송강이 직접 기거했던 곳으로 당시에는 죽록정이라 불리었던 것 같다.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송강정은 정철의 죽음과 함께 버려지게 되었고 그의 사후 200년이 지난 후에는 주춧돌과 담장의 흔적만 남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의 후손들이 언덕에 소나무 수천그루를 심고 영조 46년(1770)에 다시 정자를 지었다. 이렇게 중수된 오늘날의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 옆이 마루로 되어 있다.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언덕 전체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8. 식영정
 
 
조선시대의 대문장가인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명종15년(1560)에 지은 정자로 임억령은 정자에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식영정이라 이름 짓고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불러 문장을 짓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정철, 고경명, 김성원, 임억령을 식영정 사선이라 불렀고, 이들의 문장은 지금도 식영정 안에 현판으로 남아있다.
 
식영정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정철의 성산별곡이다. 성산별곡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주변의 풍경과 식영정의 주인 김성원의 풍류를 그리고 있다. 식영정 아래에는 부용당 이라는 현대식 정자가 하나 더 있고, 뒤로 서하당 김성원이 살았던 서하당 터가 있다. 또 식영정의 오른쪽 계단 아래에는 정철의 성산별곡의 탄생지임을 알리는 ‘송강정철 가사의 터’ 라는 석비가 서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9. 소쇄원
 
소쇄원은 양산보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가 기묘화사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으로 되어있다. 전원은 대봉대와 상하지,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은 오곡문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아래에는 돌로 된 가산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 구역은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과 오곡문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가 있으며 오곡문 옆의 바위는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뒤편 언덕에는 복숭아 나무가 심어져 있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가 있으며 영조 31년(1755)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0.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요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76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11. 신재효 고택
 
신재효는 광대소리를 위해 만장의 기염과 소담한 자료와 이론적 유산을 남겨놓았고 그로인해 판소리가 하나의 문학형식으로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타락한 조선조 양반소설이 기울어져 갈 즈음에 등장한 서민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요, 연출가이며, 광대의 지휘자이기도 하다. 또한 광대들 뒤에서 그 사설을 정리하여 준 숨은 공로자로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기법으로 판소리 사설의 창작과 집대성으로 필생의 대업을 이루었다.
 
고창읍성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신재효의 고택은 그가 38세에 지어 말년까지 살면서 노래청을 두고 수많은 명창을 길러낸 곳이다. 1850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물을 멀리서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서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꾸몄었으나 모두 매몰되고 연못은 복원하였다.
 
   
 
※ 셋째 날
 
12. 선운사
 
신라 진흥왕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위덕왕 24년(577)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 뒤에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 3년(1354) 효정이 중수하였고, 성종 3년(1472)부터 10여 년 동안 에 의해 중창되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840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 건물을 세우고 화상을 조성하는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선운사 사적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이라는 제목 아래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 영산전, 명부전, 만세루, 산신각, 천왕문, 대방, 요사 등의 건물이 있는데,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는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금동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 영산전목조삼존불상 등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9호인 석탑, 제31호인 범종, 제32호인 중종과 부도, 탑비 등이 남아 있다. 동불암의 마애불상은 높이 13m, 나비 3m나 되는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와 탑비 중에는 김정희가 쓴 백파대사사적비와 채제공이 쓴 설파대사사적비가 있다. 이 밖에도 절 주변에 진흥굴, 용문굴, 만월대와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13. 내소사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고찰로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다. 내소사가 과거에 소래사였음은 성종 17년(1486)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이규보의 <남행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양사의 말사로 있었으나 지금은 대하불교조계종 제 24교구 선운사의 말사이다. 고려때의 사적은 저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지었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고 예술적이다. 내소사의 유물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동종과, 영산회 괘불탱화 등이 있다. 또 수령이 약 500여년이 되는 느티나무와 약 천 여년 쯤 되는 느티나무가 있으며, 봉래루 앞마당에는 수령 300여년으로 추정되는 거목 보리수가 자리하고 있다.
    
 
14. 채석강
 
채석강은 강이 아니라 썰물 때 드러나는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의 층암 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기암괴석들과 수천 수만권의 책을 차곡차곡 포개놓은 듯한 퇴적암층 단애로 ‘강’자가 붙어 오해하기 쉽지만 중국의 채석강과 그 모습이 흡사해 채석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닭이봉 한자락이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면서 형성된 퇴적아츤이 절경이다.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만권의 책을 쌓아올린 듯한 와층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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