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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국어국문전공 학술답사 (충청남도)
국어국문 <www4340@ddongduk.ac.kr> 조회수:2477
2003-05-05 02:50:00
 
2003 국문학과 답사 보고서
 
-박미정
 
 
 
 
첫째 날(5월 14일)
 
 
 
1.
처음 간 곳은 세종대왕릉이다. 세종대왕릉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현재 세종대왕릉(영릉)의 지세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인데다 정남향이어서 풍수지리상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한다. 한글창제는 물론이거니와 천문 과학기기의 발명과 정비, 악기, 악보의 개조와 정리를 비롯해 정치, 경제, 문화, 국방, 교육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조선왕조 500년 사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 평가되는 임금이다. 세종대왕릉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으며 왼쪽으로는 1977년에 지은 세종대왕 기념관 ‘세종전’이 있다. 세종전 안에는 집현전 학사도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세종전 밖에는 해시계, 관천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대왕릉은 사적 제 19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찾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게 하는 곳이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임금이자 학자였던 세종대왕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고, 한글을 창제하신 이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곳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며 한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가질 수 있었다.
 
 
2. 
이천 도자기마을은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에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토기제작이 활발했던 이천 지방은 삼국시대의 토기 문화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와 가마 불을 지피는데 쓰이는 화덕이 넉넉한 곳이다. 옛 조선 백자의 요지로서 8?15광복 이후부터 이웃한 광주관요의 조선 도자기 전통을 이어 받아 전승도예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의 오랜 전통으로 이어온 도자기 굽는 과정을 볼 수 있었고,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다.
 
칠장사는 칠현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신라 7세기 중엽에 자장율사에 의하여 개기하였다는 사찰로서, 문헌에 보면 사찰이 번창할 때는 건물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총 56동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칠상자에는 국보, 보물급 등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로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악인을 제도한 고사에 따라 산 이름을 7현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칠현인이 오래 머물렀다 하여 칠장사로 명하였다.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당으로 삼아 사찰을 중건하여 친히 김광명에게 하사한 친필족자가 보관되어 있고, 안성봉업사 석불입상이 있으며, 칠장리 어구에 부도군이 위치해 있다.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편안하게 다가온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숨 쉬는 공간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3.   
정송강사는 충청북도 진천군에 위치한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송강 정철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정철선생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 등의 관찰사로 지내는 동안 천부적 문재를 발휘하여 관동별곡과 훈민가를 지었으며. 그 뒤 낙향하여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남겼다. 사당의 뜰에 서 있는 정철의 시비에는 사미인곡의 서사(敍事)가 고어체로 씌어 있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는 듯 하는 구나. 염량은 때를 알아 갔다간 다시 오니, 듣고 보고 느끼는 일도 많기도 하다.”
 
 
 
 
임금에 대한 마음을 읊고 있는 것으로 송강이 느끼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을 지은 송강의 사당에서 그 수려한 글을 생각할 수 있었다. 관동별곡에 그려진 풍경을 생각하며 송강이 글을 쓰는 모습을 생각했다.
 
 
 
 
 
둘째 날(5월 15일)
 
1.  
추사 김정희의 고택은 예산군 신암면 예림리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충남 기념물 제 43호)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80평이 넘는 대저택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와 사당채로 이루어졌다. ㅁ자형 가옥으로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된 이른바 대갓집 형태이다. 고택 곁에는 추사의 무덤이 있고, 그곳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는 추사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화순옹주의 무덤 곁에는 껍질에서 하얀빛이 쏟아져 나오는 백송(천연 기념물 106호)이 있다.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얻어다 심은 것이라 전하는 이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나무이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이자 서예가로 살다간 추사 김정희의 얼이 실려 있는 듯 보였다. 풍성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흰 껍질로 몸을 덮은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듯, 김정희의 고매한 인품인 듯, 당당하고 고귀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김정희의 고택주변에 있기에 그 고귀함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나무인 듯 추사 김정희도 그러한 삶을 살다갔겠구나 생각했다.
 
 
2. 
가야산의 서산 마애 삼존불상은 사적 316호인 보원사지 입구 좌측 가야산록에 있는 큰 바위에 조각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엣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오래 되고 또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1958년에 발견되었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변하는 특징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신비해 국보 제 84호로 지정됐다. 국사책에서만 보던 불상을 직접 보니 그 신비함과 웅장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방향에 따라 바뀌는 미소는 정말 신비로웠고 어떻게 이런 불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문화재가 그러하듯 우리 선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3.
남원군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한다. 남원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인조의 3남인 안평대군의 6대손 병원의 아들이다. 남원군묘는 ‘명당자리’로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에 이의를 달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보인다. 명당의 조건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묘에 올라가보면 저절로 명당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힘들게 올라가 주위를 바라보니 그 풍경이 기가 막혔다.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주변에 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을 보면 마치 구름 위에 올라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4.
한용운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위치한다.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만해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 있어 생전의 만해선생이 마치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따스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툇마루며 우물, 장독대가 마치 시골집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위대한 시인의 생가라기보다 그저 따스한 시골집에 와 있는 느낌은 생전에 만해선생이 어떠한 분이었는지 알게 해준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이런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생가에 그 느낌이 남아있는 것일 것이다. 마당을 둘러보면 작은 연못과 정자가 있고 오석에는 만해선생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새겨져 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해선생의 조국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절실하게 그려져 있다. 일제에 저항했던 그 마음과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가졌던,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만해선생을 생각했다.
 
 
 
 
 
셋째 날(5월 16일)
 
 
1.
무령왕릉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13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으로 1071년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 작업을 하다가 우연하게 발견되어 발굴 조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 잡고 있는 고분들은 웅진 도읍 기에 재위하였던 백제의 왕들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우연하게 발견되어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은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국내외 학계의 백제 문화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연꽃무늬, 마름모꼴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를 아름답게 새긴 벽돌을 그 쓰임에 맞게 배열해 놓았다. 무덤 속이라고 생각하니 약간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 내부의 모습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벽돌 하나하나에 무늬를 넣은 것은 정말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넓었는데, 그 넓은 곳을 만들었던 손길이 왕에 대한 충성이었을까, 강제 노역이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죽은 후의 묘까지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 웅장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왕의 위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보면서 백제 때의 물건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묘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유물들은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잠겨 있는 문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수공사가 잘못되어서 물이 새고 벽체가 기울어 가서 보수 후에는 영구 폐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최대의 발굴이라던 무령왕릉의 발굴이 단 15시간 만에 끝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덤이 지닌 많은 학술적 정보를 놓쳤다고 한다. 소중한 유산을 현대의 후손들이 잘못 하여 훼손되고 그곳에 더 있었을지 모르는 소중한 조상의 숨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슬프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의 우리 조상들의 숨결과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 증거를 내보이기 위해서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로서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다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하나의 증거인데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본 모든 유적들은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돈으로는 절대로 그 가치를 잴 수조차 없는 귀중한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왔다는 것, 이전에도 지금도 이후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2.  
성주사지는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곳으로 인근은 물론 전국적으로 번성했던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운 절이었으므로 창건 당시부터 백제의 중심 사찰이었던 셈이다. 성주사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 성인이 거하는 절이라는 뜻인데, 성인은 신라 말기의 명승 무염국사를 일컫는다. 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현재 국보8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보물 19호 오층석탑, 보물20호 중앙삼층석탑, 보물47호 서삼층석탑, 지방문화재인 동삼층석탑과 석계단, 그리고 석등이 있다. 그간의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드러났다. 절터 서북쪽에는 제법 멋을 부려 세운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부도비가 있는데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절터만이 남아 쓸쓸한 느낌을 주기도 했던 곳이다. 언뜻 지나가다 보면 유적지인가 할 정도로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군데군데 서 있는 석탑만이 지난 세월을 지키고 있다.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의 거북이의 모습이 많이 상해있었지만, 그 위엄과 풍채는 상하게 할 수 없었다. 절에 가면 있는 탑들이 그러하듯, 언뜻 보면 석탑이라는 것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국사책에서 보던 석탑이 대단치 않아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본 석탑들은 그 하나하나가 그 긴 세월을 담고 있었으며 얼마나 공을 들여 지은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절도 사라지고 터만 남은 그 곳에서 비바람을 견디고 세월을 견디며 남은 흔적이 탑 구석구석에 남아있었고, 귀퉁이가 훼손되고, 비바람에 상처 입은 채로 예전의 절터를 지키고 있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그 수많은 세월을 바라보며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킨 탑들이 조금은 애처롭다는 마음이 들었다.
 
3일 동안의 답사는 길지만 짧았다. 평소 보지 못했던 유적들을 보았기에 긴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에 깃들어있는 세월과 숨결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이런 곳이 우리나라에 있었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몰랐던 것보다는 이제 다시 올 때에 제대로 느끼고 갈 수 있기에 알고 가는 것이 행복하고 또 뿌듯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온 답사였지만, 그만큼 마음에 우리나라, 우리 조상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온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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